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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서울 밴쿠버 그리고 제주 중심과 경계에서 본 대한민국
김영규 저 I CUP I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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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  150 * 205 mm,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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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향한 통렬한 반성의 단초가 되는 책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을!
성경으로 세상을 읽어보라

경계의 땅 제주에 정착한
기자 출신 목회자의 통찰력 있는 메시지!
연합뉴스 기자, 뉴스전문채널 YTN 창립준비요원 및 취재부서 책임자로, 근 20년 간 기자로 활동하던 그가 돌연 미국, 캐나다, 한국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의 글은 간결, 명료하면서도 핵심을 파고든다.

성경은 세상을 분별하라고 했다.
어떻게 사는 게 분별하며 사는 것일까?
이 책은 이에 대한 확실한 방향을 제시한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을 들라’고 했다. 그의 언급은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산 속에 홀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절차탁마하는 수도승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썩었다고 냉소하고 통박만 하는 비평가도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세상과 이웃에 대한 따스한 시각과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분별력을 제공한다.
 
 
기획자의 변
프롤로그

1부. 이슈를 말하다
사마리아인과 바리새인 사이_ 난민 문제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 목사?
바람직한 대통령
청문회 유감
역사의 정리
또 다른 신_ 미투 운동 1
또 다른 신_ 미투 운동 2
뱃속이 검은 사람
복면 세상, 같은 복면 다른 의미
육지 것과 섬 것
표절에 대한 변명

2부. 분별하며 살아가기
분별하며 살아가기
꿈을 이루시는 분
두려움에 대한 단상
상처 치유하기
최고입니까? 최선입니까?
쓰레기와 하나님 뜻
다시 한국에서 살기
이별은 만남이다
가짜뉴스
감옥에 하나님이 계신다
장모님 활용법
별난 차례
장식품을 버려라

3부. 교회를 말하다
자기 왕국을 짓는 교회
사울, 명성교회, 그리고 총회 재판국
향기 나는 인생
인공지능 시대와 인간
청지기로 산다는 것
모세처럼만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관성적인 교회생활 탈피하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축구 경기와 하나님
폭풍우의 축복
먼지와 죄 그리고 인간
슬기로운 감빵생활

에필로그_ 빨간 성경책
 
 
우리 또한 난민이었다. 특히 4.3항쟁의 아픔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잘 안다. 기록을 보면 끔찍한 살육을 피해 당시 제주도에서 일본 땅으로 이주한 난민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의 나라 땅, 더욱이 바로 해방직전까지 온갖 횡포를 부려온 침략자들의 땅을 제 발로 찾아갔으니 차별이나 무시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며 생명을 보전했다. 자신을 절제하고 희생하면서 한 푼 두 푼을 모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고 그로 인해 제주에 남아있던 이들도 살아남게 되었다. 예멘 난민들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끔찍한 전쟁을 피해 제주도 땅에 찾아왔다. 그들의 목적 또한 ‘사는 것’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범죄 가능성이 크다고, 가짜 난민일지도 모른다고,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그들을 내쫓을 것인가? 제주도가 간직한 역사는 그렇게 묘한 역설로 지금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다니엘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 신분이었다. 물론 우리 또한 지금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아주 단순하고 쉽게 생각해보자. 예수가 지금 제주도 땅에 오신다면 과연 올 데 갈 데 없이 떠도는 그들을 이교도라 해서 쫓아내실까?
(20~21쪽)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늘어나고 무감각해진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 UCL 심리학과 연구진은 이를 뇌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실험 결과 작고 하찮은 거짓말이나 부정직한 행동을 하면 뇌 편도체 활동이 급증했다.
그것이 바로 ‘양심에 찔리는 감정’이다. 이로 인해 거짓말을 하는데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다음에도 거짓말을 할 경우엔 편도체 활동량이 줄어들고 제동력이 그만큼 더 약해져 이후부터는 점차 자연스럽게 더 큰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고 했다. 이 구절에 대해 공동번역본은 “거짓말쟁이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고 표현한다. 편도체의 활동량이 줄어드는 것은 곧 사탄의 노예라는 표시인 셈이다. 런던대학 연구진은 편도체의 감소를 막는 게 무엇인지, 즉 거짓말을 반복 확대하지 않도록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계속 연구할 예정이라 한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밝혀지면 현대판 퇴마사가 탄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거짓의 꾐에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 깨어 영적 분별력을 가질 때 사탄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가짜뉴스라는 새롭게 형성된 전쟁터에서 거대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시작하고 있다.
(134쪽)

나는 사랑의교회 문제를 신앙의 기본개념 측면으로 살펴보고 싶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또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의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 과정은 물론 결과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그 일로 인해 교인들은 분열되어 갈라섰고, 건축 인허가 과정의 불투명은 사회적 특혜 논란을 일으켰다. 천문학적 건축비가 투입돼 그 크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건물은 실정법 위반의 도마 위에 올랐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교회, 모든 기독교인까지 싸잡아 손가락질하며 비웃음거리로 전락시켜버렸다. 전도는커녕 믿음이 약한 이들은 교회를 떠나게 돼 작은 교회나 미자립 교회들은 더욱 어려워지게 생겼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이제 사랑의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의 교회, 한국 기독교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쯤이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수치’ 또는 ‘모독’ 수준 아닐까 싶다.
(147쪽)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쁘게 일만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쉬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당시 모두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예수는 “그럼에도 일해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먼저 쉼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셨다.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
사역자 중에 간혹 쉬는 것을 게으르다고 여기고 죄의식을 갖거나 터부시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쉬는 것 자체도 하나의 일이다. 쉼은 충전이다. 도약을 위한 발판이다.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그렇다면 쉼이야말로 얼마나 가치 있는 사역의 밑거름인가? 바빠서 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일을 잘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99쪽)

제아무리 인간이 과학과 지식을 뽐내며 바벨탑처럼 자신을 과시해도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게 폭풍우다. 물리적인 폭풍우, 인생길에서의 폭풍우.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편협하고 왜곡된 나의 자리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건 dead zone처럼 썩어 죽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폭풍은 하나님의 긍휼이고 선물이며 필요이기도 하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고 당장은 원망스러워도 말이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시는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우리 인생은 한 계단 더 위로 오르게 될 것이다.
(217쪽)

죽음 앞에서 가장 귀한 가치를 발견한 뫼르소와 신영복은 똑같은 사형수 신분인 우리에게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사면 대상자라고 뻐기고 까불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유한한 시간 앞에서 지금 감사함으로 기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미래의 소망을 가진 자들로 현재의 삶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감사와 기쁨과 겸손, 지금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이뤄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이야말로 갇혀있으면서도 갇히지 않은 자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자유이며 ‘슬기로운 감빵생활’일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229쪽)

[프롤로그 중에서]

바닷물의 염도는 3.5%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 1kg에 35g 정도의 소금, 극히 미량이 들어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은 십리 밖에서도 보이고 등대불은 40~50킬로미터 밖에서도 관측된다고 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다. 우리나라 인구의 20% 가량이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물은 짜지 않고 불빛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캄캄한 세상은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다. 교회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성도들이 적은 것도 아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들이 즐비하고 훌륭한 교계 지도자, 학자들도 많으며 매년 수천 명의 목사가 배출된다. 사회 지도층이나 상류층으로 갈수록 기독교인 비중은 훨씬 높아진다. 역대 정부의 장차관급 이상 인사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거의 50%대에 이른다.
장로 대통령 때는 무려 70%에 이르기도 했다. 이쯤이면 거의 기독교 국가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탁하기 이를 데 없고 기독교적 가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부정과 부조리, 범죄와 일탈의 중심에는 늘 자칭 타칭 기독교인들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문을 닫고 뒤돌아서는 순간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는 교인, 예배당 안에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성자처럼 말씀을 전하고 정의롭게 행동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야수처럼 돌변하는 성직자… 그런 부끄러운 얼굴이 마치 기독교의 본디 모습인 것처럼 오도되며 슬픈 자화상으로 고착되어가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
......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약도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용없듯 하나님 말씀이 천지만물을 개벽케 하여도 입에 머금다 그냥 토해 내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 지금 또다시 십자가에 올라 물과 피를 다 쏟아 낸들 당장 내 손 안에 들어오는 은전 몇 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겠는가? 신앙이 말씀과 삶의 이중적 구조, 즉 물과 기름처럼 각각 별개로 존재하여 서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나 자신이 곧 유다이며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씀을 잘 몰라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들도 많지만 말씀을 알면서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적용하지 못한 채 그냥 그리스도인의 껍데기만 쓰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믿음과 행함, 그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해선 우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맞닥뜨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목적지를 알아야 방향을 잡고 엔진에 시동을 걸고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말씀이 실재가 되어 살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단히 하나님께 묻고 들어봐야 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의 내면을 끊임
없이 성찰하고 사고해야 한다.
......
믿음과 삶의 부조화로 인해 갈등하며 방황하는 그리스도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고 건조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하나님을 잘 몰라도 참된 삶의 가치를 깨닫고 바르게 살고자 길을 묻는 이들. 모두에게 이 글이 전이의 팁이 되면 좋겠다.
 
 
글은 글쓴이를 닮아야 한다. 아니 닮을 수밖에 없다. 글쓴이를 닮지 않은 글은 공허한 껍질에 불과할 때가 많다. 알맹이가 꽉 들어찬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새롭게 읽는다. 글쓴이를 통과한 세상은, 우리가 만나는 일상의 세상을 반성하게 하는 세상이다.
글과 글쓴이가 만들어내는 이치가 이러하다. 글쓴이가 걸어온 삶의 여정은 글에 생명을 부여하는 통로다. 삶의 여정에서 이탈한 글은 속이 빈 글, 흔히 허구라 불리는 껍데기만 있는 글이다.
김영규는 대한민국의 중심과 경계 양쪽에서 살아온 작가다. 그의 글에는 그의 독특한 삶의 이력이 녹아있다. 중심을 알고 경계에서 살았기에 쓸 수 있는 글이다. 서울, 밴쿠버, 제주란 공간에서 살아왔기에 쓸 수 있는 글. 겉은 친근한 이웃처럼 익숙하지만 속은 낯섦으로 채워진 글, 그래서 읽는 이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읽게 하는 글, 이것이 김영규의 글이 가진 특징이다.
지금 우리는 남과 북, 동과 서, 이런저런 까닭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익숙한 세상이다. 슬프게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세상은 비정상적이다. 익숙하다고 해서 정상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반성에서 시작된다.
반성을 결여한 변화는 찰나의 유행으로 끝난다. 아프지만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이 반성의 단초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연합뉴스 공채로 입사해 국회, 청와대 출입 기자를 거쳐 한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3개월여 간 구 소련을 일주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현장을 취재했다. 뉴스전문채널 YTN의 창립준비 요원에 선발돼 방송으로 무대를 옮겼다. 프레스센터 장학생으로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 진학해 수석 졸업한 이후 스포츠, 사회, 편성, 문화 등 취재부서의 책임자로 한국형 24시간 뉴스채널 체제의 기틀을 닦았으며 특화뉴스시스템을 처음 도입했다.
뉴스에 빠져 20여 년 동안 허우적대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고민을 하다 캐나다로 연수를 떠났다. 이후 기러기생활을 하며 서울과 밴쿠버를 오가다 캐나다에서 이메일로 사표를 제출하고 밴쿠버에 정착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부활절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던 어머니를 사고로 잃은 후 배신감을 느껴 하나님을 등졌다. 캐나다 대자연 가운데서 자유를 만끽하던 어느 새벽 “네 신발을 벗으라!”는 콜링을 받고 충격을 받아 한동안 다시 삶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이후 회심하여 본격적으로 ‘신의 학문’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글로벌대학교(Global Univ.)에서 성경신학을, 캐나다 트리니티대학교(TWU) VIEW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전공하고 귀국 후 총회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목사가 됐다.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회원으로 제주도에서 크리스천 쉘터를 운영하며 제주총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크리스천 라이프> 신문에 고정으로 칼럼을 쓰면서 각종 매체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적 삶을 실천, 전파하고 있다.
캐나다 한인 신문에 시와 수필이 당선됐으며, 논문으로 “메르스 사태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고찰”,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4대강 개발의 문제”, “뉴스전문채널과 공중파 뉴스의 내용 비교 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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